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 1권 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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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災禍)에 대한 이중의 투쟁

어떤 재화가 덮쳐 오면 인간은 그 원인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우리의 감각에 미치는 작용을 바꾸든가 해서, 즉 이익이 아마 더 후일에 가서야 비로소 명백해지는 그런 행복으로서 재화를 달리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종교나 예술, 또는 '형이상학적 철학'은 감각변화의 방향에 작용하려고 노력한다. 첫째는 체험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바꿈으로 해서, 예를 들면 '신은 사랑하는 자를 응징한다'는 명제를 응용해서, 둘째는 고통이나 정서일반에게 모종의 쾌(快)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해서(비극적인 것의 예술은 여기에 그 출발점을 둔다). 해석을 달리한다든지 다시 해석을 한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기울면 기울수록 그만큼 인간은 재화의 원인에 주목하고 제거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그때뿐인 한정된 완화나 마취는, 예를 들면 치통의 경우에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다 심각한 고민에 있어서도 사람을 만족케 하는 것이다. 종교나 모든 마취술의 지배가 줄어감에 따라 그것만큼 심하게 인간은 재화의 현실적 제거에 착안한다. 이것은 물론 비극시인에게는 곤란한 일이다. 왜냐하면 무정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운명의 영토가 점점 좁아짐에 따라서 비극의 재료도 점차 없어져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려에게는 더 곤란한 일이다. 왜냐하면 승려는 지금까지 인간의 재화의 마취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COMMENT
ㅡ삶은 고(古), 마약은 많지만 효과 100%는 없다.
ㅡ종교나 예술, 두 기만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내게는 자명하다.
ㅡ비극시인은 운명과 비극과 슬픔과 절망의 영토가 점점 넓어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세계는 가만히 있다. 영토를 확장하거나 줄이는 건 시인의 펜 끝에 달려있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항상 물기로 가득하다. 가만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슬픔을 건져내려면 항상 촉촉한 눈을 하고 있어야 한다. 영상은 눈물로 흐릿하게 보이고, 보이는 실제보다 더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눈과 일체가 되어 펜도 항상 촉촉해야 한다. 슬픔을 종이 위에 찍어바르거나 모니터 화면 위에 두드려 옮겨야 한다.
ㅡ"그런데 그 지우개는 뭐에요?"
"응. 이성이란다."
"이성이요?"
"가끔씩 써 주면 효과가 좋지. 또다른 이름은 절제라고도 하지."
"자주 쓰세요?"
"아니. 나는 아직 이걸 다루는데 서툴러서 말야."
ㅡ재화가 있어서 고통이 있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와 예술이 있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이 없다면 인간은 재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올바른 수단이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가능할까?
ㅡ코멘트 위의 텍스트는 제 3장 '종교적 생활'의 첫번째 아포리즘이다. 내 주위 환경은 종교색이 짙다. 이것은 내게 두가지 가능성을 선사한다. 종교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다행히도 나는 망각과 왜곡과 비판으로 비교적 착실히 맞서 싸우고 있다. 아직까지는...... 더욱더 공고하게, 아주 철저하게. 사실 이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냥 설렁설렁하게 있다가는 언제 은근슬쩍 회유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만큼 현재 나는 위태롭다.


103p

by 양파소년 | 2005/04/17 21:56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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